사람들은 대부분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운명입니다(히 9:27). 따라서 므두셀라는 최고령인 969세를 살았지만, 결국엔 죽었습니다(창 5:27). 그래도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가능하면 건강하게 장수하길 원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진시황입니다. 그는 기원전 259년에 태어났고, 13세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인 진나라를 세워 시황제가 되었지만, 그 역시 비교적 이른 나이인 50세에 죽었습니다. 참고로 그가 서복을 시켜 불로장생할 약초를 찾아오게 했고, 그들이 제주도의 정방폭포까지 왔었다는 흔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불로초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한편 아침에 묵상한 아래 말씀은 참사람이시지만 영원히 죽지 않게 되신 한 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은 적이 있다.
그런데 보아라 영원토록 살아 있으며,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계 1:18).
위와 같이 말씀하신 분은 참하나님이시요 참사람이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죄만 없으시지만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신 분이 인류 최초로 영원히 사시는 존재가 되신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분이 참사람으로서 위와 같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분의 부활 후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예전에는 주님의 부활을 단순히 주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건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렇다면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의 부활과 주님의 부활은 어떻게 다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물론 나사로는 다시 죽었고, 주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이고, 그런 차이를 가져온 원인이 무엇이었나 하는 것입니다.
오랜 추구와 기도 후에 얻은 결론은 나사로의 부활은 순간적인 기적이었다면, 주님의 부활은 죽지 않는 요소인 그분의 신성이 그분의 죽을 인성 안에 연합된 결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고운 가루에 기름이 섞인 소제와 같습니다(fine flour mingled with oil)(레 2:4).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사람을 영원히 죽지 않은 존재로 만드는 이런 일이 예수님만 아니라 거듭난 우리 안에서도 지금 진행 중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보통 로마서 8장을 말할 때는 생명의 영의 법이 우리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한 것을 많이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에 더해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그 신성한 생명(조에)이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을 점차적으로 조에(zoe)로 만들어 가는 다음과 같은 과정입니다.
“영은 의 때문에 생명”: 제가 로마서 8장 10절의 이 부분을 개역성경(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으로 읽었을 때는 거듭날 때 우리의 죽었던 영이 살아났다는 의미로만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영어 성경(ASV, ERV)의 ‘the spirit is life’에서 “life”가 헬라어로 신성한 생명을 가리키는 조에(zoe, 2222) 임을 알게 되면서 이 구절을 더 주목하게 되었습니다(요 11:25).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영이 다만 ‘살아났다’는 차원을 넘어서 우리의 영 자체가 ‘조에’라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저도 이런 엄청난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다음 몇 가지 이유로 여기서의 영(프뉴마)은 킹제임스 계열 한글 번역처럼 성령이 아닌 ‘사람의 영’이 맞고, 이 영이 ‘조에’(Zoe)(2222) 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1) 우리 몸과 대조되는 문구에서 영을 말하고 있는 점. 2) 영이 생명임을 말하면서 “의 때문에”라는 조건을 붙인 점(만일 성령이라면 이런 조건이 필요 없음. 3)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조건에서만 영이 생명(zoe)이라는 점. 4) 이 구절을 매우 심도 있게 연구한 “로마서 8장 10절의 “영”(pneu’ma)에 대한 해석”(유상섭, 전 총신대 교목실장)이라는 탁월한 신학 논문의 논지와 내용.
요약하면, 허물과 죄들 가운데 죽었던 사람의 영이 부활하신 주님을 생명으로 영접하여 두 영이 한 영으로 연합되었을 때 우리 영도 다시 죽지 않는 존재인 조에가 된 것입니다(엡 2:1, 고전 6:17, 레 2:4). 따라서 최소한 우리의 거듭난 영은 현재에도 영원한 존재인 “하늘에 속한 예루살렘”의 일부입니다(히 12:22).
“영에 둔 생각은 생명”(6절): 우리가 거듭난 후에 우리의 혼의 주도적인 부분인 생각을 조에가 된 거듭난 영에 지속적으로 둘 때, 결국에는 우리의 생각까지도 ‘조에’가 됩니다(the mind (set on the spirit) is life(zoe 2222)).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까지 거처를 확대하신 결과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살아 있는 동안 이 단계에 도달한 믿는 이들에게 “새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새기실 것입니다(계 3:12).
“죽을 몸에도 생명을 주실 것임”(11절): 결국엔 우리의 죽을 몸도 이 조에의 생명으로 적셔져서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인 새 예루살렘이 될 것입니다(계 21:2).
만일 진시황이 이 진리를 보았다면 불로초를 찾거나 중금속인 수은을 가까이하다가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습니까? 만일 죽어도 다시 살며 영원히 사는 길이 있고 큰 돈이 드는 것도 아니라면, 불로초의 실재이신 부활하신 주 예수님과 더 깊이 연합되는 삶을 추구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최소한 사도 바울은 이것을 보았고 이 “뛰어난 부활”의 과정을 힘써 달렸습니다(빌 3:11, 딤후 4:8).
오 주님, 우리도 주님처럼
‘내가 죽은 적이 있다. 그런데 보아라 영원히 살아 있다.’고 장차 선포할 수 있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