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마리아처럼 그 주의 첫 날 새벽 아직 어두울 때, 막달라 여인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요 19:1) HOME  >  그리스도의 편지  >  이른 새벽 마리아처럼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작성자관리자 작성일2023.01.25 조회수1424 댓글0

 

 

 

 

  요즘 점점 나이 먹는 것을 실감합니다. 전과 달리, 성경을 읽어도 잘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름 생각해 낸 고육책으로, 같은 내용을 여러 번 읽습니다. 또한 가끔은 읽은 것을 안 보고 말해봅니다. 물론 전부를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날 읽는 성경의 첫 구절 혹은 (큐티 책자에서) 그날 주어진 핵심 구절 등을 그리합니다. 제가 이 과정에서 염두에 두고 실행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읽은 말씀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찾습니다. 특히 아침에 묵상한 아래 구절처럼, 문장에 명령형 동사가 쓰였으면 더욱 그리합니다.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더욱이 영적인 은사들을 간절히 사모하되,

특별히 신언을 하도록 하십시오(고전 14:1).

 

 

  사랑을 추구함: 보통 사랑은 저절로 우러나오는 인간의 감정입니다. 매력 있는 사람을 보면 끌리는 이성 간의 사랑이 그렇고, 모성애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위 사랑을 ‘추구하라’(Pursue, 1377)는 말씀은 이런 자연스럽게 생기는 감정 그 이상의 무엇을 요구합니다. 더구나 이 사랑은 인간에게는 없는 ‘아가페’(26)의 사랑입니다. 이처럼 한국말 뜻은 알겠는데, 영적인 의미가 파악이 안 될 때는 주님을 앙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움이 될만한 관련 구절들을 찾던 중에, “서로에 대한 여러분 각 사람의 사랑도 증가하고 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됩니다”라는 말씀에서 빛이 왔습니다(살후 1:3, 요일 4:12).

 

 

 

  즉 위 사랑은 우리가 영접한 신성한 생명의 속성 중 하나인데, 이 사랑이 우리 존재 안에서 점점 증가하고, 또 다른 이들에게도 더 많이 전달되도록 이런 사랑을 억제하는 우리의 천연적인 혼을 비워내는 것이 사랑을 추구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묵상이 이 단계에 이르자 “사랑을 추구하는 은 생명의 은사들을 발전시키기 위해 생명의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다”라는 회복역 성경 각주 설명이 바로 이해되었습니다(고전 14:1, 각주 1). 즉 사랑을 추구함과 생명의 자람은 같은 과정인 셈입니다.

 

 

  참고로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은 이 아가페의 사랑을 15가지(오래 참음, 친절함, 시기하거나 뽐내거나 교만하지 않음, 무례히 행동하거나 자신의 유익을 구하거나 성내거나 남의 잘못을 마음에 두지 않음,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함,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믿고 바라며 견딤)로 묘사합니다(고전 13:4-7).

체험을 돌아보면, 위 사랑의 각 방면들을 일단 알았으면, 그와 불일치하는 어떤 환경에 놓일 때는 우리 안에서 내적인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고집을 꺾고 그분께 항복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의 반복을 통해, 위 아가페 사랑의 각 방면들이 점점 더 우리 존재에 짜여지게 되고, 주변 사람들도 그런 모습을 감지할 수 있게 됩니다.

 

 

  위 구절을 묵상하는 며칠 동안 한 신실한 성경 교사가 쓴 찬송시가 계속 제 안에 맴돌았습니다(305). 그중에서도 특히 “거짓된 모든 일들은 날 인내케 하고/ 그 모든 환경의 십자가 날 주만 의뢰케 해/  마음 겸손해질  모든  사랑스럽네”(6절)라는 부분이 많이 만져졌습니다. 8절까지 있는 내용을 다 소개할 수는

없으나 그는 참으로 위 ‘사랑을 추구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중공의 격변기에 터무니없는 죄명으로 20년 형을 언도받고 노동 교화소에서 생을 마감할 즈음에, 처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여전히 기쁨을 유지하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또한 그가 처한 밖의 환경은 거의 최악이었지만 “내 마음 늘 행복하나 또 구할 것 있다면/ 주님께 내 사랑의 맘 다 표현하는 것/ 주 위한 많은 일보다 주의 기쁨 구하리(7)”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왜 화가 날까? 은근히 자기 유익을 구하거나 뽐낸 적은 없었나? 왜 남에게 상처 준 것은 쉽게 잊으면서 자기가 상처받은 것은 그토록 오래 기억할까? 왜 우리의 친절은 사람에 따라 혹은 상황에 따라 변하나? 위 사랑을 추구하는 생활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자성이 있습니다.

 

 

  신언함: 이번 묵상으로 밝아진 것은 여기서의 신언(prophecy)은 위와 같이 사랑을 추구한 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말에는 사랑의 실재가 담겨 있어서, 듣는 이들이 격려와 위로를 받고 교회가 건축됩니다(고전 14:3-4). 사랑을 추구하는 이들은 “나쁜 ”을 거르고, “듣는 사람들을 건축하는  좋은 을 필요에 따라” 할 수 있는 역량이 있습니다(엡 4:29). 사랑도 신언도 결국은 교회 건축을 겨냥합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주님 앞에 나아갔을 때 다음 세 가지가 생각났습니다.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1) “끊임없이 기도하여” 사랑이신 주님과 연결되고, 2) “모든 일에 감사하여” 이 연결의 끊어짐을 막고, 3) “항상 기뻐하여” 이 사랑이 표현되고 다른 이들에게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살전 5:16-18).

 

 

 

 

 

 

오 주님, 남은 일생 끊임없이 사랑을 추구하게 하시고,

신언을 하여 당신의 갈망인 교회를 건축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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