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처음에는 만물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아닌 것’으로 나누고, 전자는 절대시하고 후자는 배설물 (refuse, 4657)로 여기는 바울의 관점이 좀 치우쳐 보였습니다(빌 3:7-8). 그러나 계속된 성경 읽기를 통해 하나님의 갈망과 그리스도의 가치를 더 깊이 알수록, 저도 점점 같은 부류가 되어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가끔은 ‘이것이 맞는 방향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그럴 때마다 늘 저는 위 바울의 관점이 하나님의 뜻을 관심하는 모든 이들이 가져야 할 가치관이자 세계관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런 관점을 가질 때 제 깊은 속에 전혀 거리낌이 없고, 성경의 가르침과도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결론의 책인 요한계시록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최종 확대인 ‘새 예루살렘’과 그 외의 것들이 가게 될 ‘불과 유황의 못’으로 귀결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분법은 아래 본문 이해에도 도움이 됩니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the pure in heart)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5:8).
늘 그랬듯이 평범한 한국말인데 그 영적인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위 본문에 나오는 ‘마음’, ‘순수한 사람들’, ‘하나님을 봄’이 무엇인지를 합당하게 이해하고 체험하려면 아래와 같이 어느 정도의 추구와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 비춤이 요구됩니다.
“마음”: 이희승 편저 <국어 대사전>은 마음을 “지(知), 정(情), 의(意)의 움직임”이라고 말합니다. 참고로 워치만 니는 마음(카르디아, 2588)을 위 생각, 감정, 의지(히 4:12, 시 13:2, 출 35:5)에 양심(히 10:22, 딤전 1:5)이 더해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그는 마음이 주로 우리의 ‘혼’에 속하고, 양심이 속해 있는 우리의 영과 연결되는 통로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타락 이후에 우리 마음의 상태는 이어지는 성경 본문처럼 매우 부정적입니다. “여호와께서 … 그가 마음에 생각하는 것마다 계속해서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창 6:5), “마음은 비뚤어져 끊임없이 악을 도모하며 다툼을 일으킨다(잠 6:14). “사람의 자손들 마음은 악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마음에 광기를 품고 살다가”(전 9:3). “마음에서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행과 도둑질 …이 나오기 때문입니다”(마 15:19).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치유될 수 없는 것이 마음이니”(렘 17:9)”.
그러나 위 마지막 말씀(렘 17: 9) 중에서 ‘마음’에 대한 아래 <회복역 성경> 각주 내용은, 타락한 우리 마음을 새롭게 바꾸어서 하나님의 거처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거짓되고 치유될 수 없는 마음에 관한 이 말씀도 하나님의 분배로 수행되는 하나님의 경륜과 관련된다. 비록 사람의 마음이 부패하고 … 치유될 수 없을지라도, 심지어 그러한 마음까지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생명의 법을 기록하시는 판이 될 수 있다(렘 31:33, 비교 고후 3:3). … 일단 하나님께서 사람 안으로 들어오시면, 그분은 사람의 영에서부터 마음으로 확장되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에 따라 타락한 사람의 마음을 처리하시는 방법이다. 에스겔서 36장 26절과 각주 참조.”
(마음이) “순수한 사람”: <회복역 성경> 해당 각주는 “마음이 순수하다는 것은 목적이 단일한 것,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고전 10:31)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는 단일한 목표를 갖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역사상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고 그분의 뜻을 성취하는 삶을 산 분은 하나님이시자 참사람이셨던 주 예수님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처럼 마음이 순수한 사람이 되려면 타락한 우리의 자아가 처리되고, 우리 마음에 그분이 들어와 그분의 거처를 정하셔야 합니다(엡 3:17). 이 과정에서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신 주님의 인격을 살아야 하고(요 6:38),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이나 딸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도 처리되어야 하며(마 10:37), 우리의 생각을 비우고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지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체험이 요구됩니다(고전 2:16). 주님처럼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의로운 삶을 사는 것도 당연히 필요합니다(눅 23:47, 요일 3:7).
사람들은 간혹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남녀 간의 ‘지고지순’의 사랑(혹은 ‘순애보’)에 가슴 뭉클해합니다. 거기에서 사랑하는 상대방을 사람이 아닌 주님으로 바꾸면 위 본문의 “마음이 순수한 사람”, 혹은 ‘아가’에 나오는 술람미에 거의 부합할 것입니다(아 6:13).
“하나님을 봄”: 요한 사도는 우리가 장차 “그분을 그분의 존재 그대로 뵙게 될 것”을 말하면서 “이 소망을 둔 사람마다 그분께서 순수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순수하게” 한다고 말합니다(요일 3:2-3). 이것은 위 본문과 같은 내용을 순서만 바꿔 말한 셈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장차 주님을 뵐 뿐 아니라 사실은 지금도 모든 것들에서 돌이켜 “주님의 영광을 바라봄”으로 그분을 뵐 수 있습니다(고후 3:18). 이런 삶은 우리를 한 단계의 영광에서 또 다른 단계의 영광으로 이끌리는 복을 이 땅에서도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오 주님, 매 순간 땅에 속한 것들에서 돌이켜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우리 안에 당신 아닌 부분들을 씻어내시어 마음이 순수한 사람으로 만드소서.